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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인간의 작업(Human Occupation)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진보적 관점
작업치료라는 공부를 하면서..
이 학문이 무척 '진보'적이라는 느낌을 계속 갖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사람이 자신의 원래 갖고 있던 능력을 잃어버렸거나, 타고나기를 어려움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지원을 할 수 있고, 그러게 참여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잖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관점을 유지하고 지켜야 한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은 '약자'로써만 있어야 하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도움만 필요한 존재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관점의 변화를 갖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지키고 유지하고자 하는 관점도 존재합니다. '나아진다', 나아져서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라는 마음. 어쩌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아니면 남들처럼 될 수 없는데, 그러려고 하는 마음을 '보수'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나아져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되,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자신을 살펴보면서 정말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키고자 하는 생각과, 변화하고자 하는 생각 사이에 항상 우리의 존재가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기능을 더 향상할 수 있게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능의 증진보다는 편리한 방법이나 도구를 활용할 수 있게 노력하고,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이해를 더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노력의 지점이 언제 달라지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항상 딜레마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정반합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Wilard and Sparkman'이라는 사람들이 쓰기 시작해서 후대로 이어지는 유명한 작업치료 교과서에서는 20년간 장애를 겪으면서 삶에서 작업치료사들을 만난 사람이 '작업치료사 당신들은 우리들 편이라오'라는 말로 작업치료사들에게 메세지를 보냅니다. 세계 작업치료연맹의 작업치료 정의를 굳이 들지 않아도, 작업치료의 중심 관점은 '클라이언트 중심 / 클라이언트 센터(client-center)'입니다.
그렇다고 '클라이언트 센터'라는 말이 당사자에게 이입하라는 입장도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지금 수동적이고 '나를 낫게 해 주시오'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언젠가는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여서 자신을 이해하고, 그래서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 그제서야 우리의 진정한 '클라이언트 센터'라는 개념이 실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치료사로써는 몇 번 안되는 경험이지만, 그래도 사회의 부당함을 참 많이 느끼고 사회참여를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작년 즈음에 정리했던 생각은, 작업치료사로써의 '개인', 그리고 그 모임인 '조직'이 보다 단단하게 다져지고 내실을 가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해서 실천하기로는 임상가들에게 '위로'가 되고 '자신감'을 높일 수 있는 '모임'을 '지속'해서 몇년간 꾸준히 하기로 하였습니다. 적지만 참여하기 시작한 선생님들이 성장하는 것을 실감하는데, 거기에서는 수동적인 '강의'나 일방적인 '요구' 때문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자신을 '알아가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장'을 뿌듯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조직은 한 사람의 리더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하니라 좋은 의도를 가진 여러 사람들 스스로의 성장에 의해 커가는 것이라구요.
모임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좀 더 확장이 되어서 조직이 되면, 그 때는 그 조직이 자생력을 갖고 결과물을 갖고 실천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큰 조직이 아니어도 됩니다. 사람이 5명 이상 함께 험한 산에서 길을 잃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철학자 강신주 인용). 공감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욕심을 부려서 착취를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격차가 생깁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큰 사회라는 관점 안에서 바라보면서도 격차를 느끼게 됩니다.
어떤 개인과 조직은 함께 모여 임상을 논의하고, 어떤 개인과 조직은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어떤 개인과 조직은 함께 정책을 구상하여 제안하고, 어떤 개인들은 회비를 내고, 어떤 개인들은 정책 감시를 하고.. 그러면서 각자의 그림을 수동적인 발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생각자람으로 공유하고.. 그래야 우리의 일이, 우리의 작업이 작업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그 때문에 작업치료가 치료에 머물지 않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양 접시를 단 '천칭'같은 작업과학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가지의 이론들이 양립하거나 상생하면서 또 다른 실천과 이론을 고민하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공간과 시간에 있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목적있거나 의미있는 활동인 작업. 이를 이해하기 위해 결국 철학과 신학을 하던 사람들이 이론가가 되었거나, 치료사들이 철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업'은 Participation 보다 Engagement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적인 존재는 'Occupational being'이라고만 생각했는데, 'Occupational becoming'이라는 역동적인 단어를 문헌에서 보고, 또다시 도올 선생의 책에서 원래 동양철학에서의 존재는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는 말을 읽고 배움의 폭을 더 넓혀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우물 안에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다각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이면의 다양한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기능을 갖고 있더라도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 다 작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작업을 이해하는 과정은 사실은 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작업치료사로 일하며 공부하다보니, 내가 진실이라 믿었던 많은 틀들이 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진보적인 발전(progressively develop)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역시 구성되는 틀들은 형태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생기니 단단하게 지키고자 하는(firmly conservative) 마음도 존재합니다. 유연하면서도 안정적이고 싶은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평형, 그리고 공존이 중요하겠지요.
답글삭제이런 생각은 확실히 인문학적인 지식의 필요성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읽히지 않던 책들이 요즘에서야 읽혀지면서 고등학교 시절 이 책을 읽던 친구들이 참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자연과학을 배운 다음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은 편인 것 같습니다. 진보적이라는 생각부터 인문학까지 생각이 널을 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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