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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아버지의 왼손
지난 달, 아버지가 넘어지면서 손으로 바닥을 짚다가 골절상을 입으셨다. 나사를 박고 고정붕대로 감아둔 채 생활을 하게 되셨다. 워낙, 이전의 교통사고로 균형을 완전히 잡기는 어려우신데, 내리막길을 내려가시다가 균형을 잃어서 손으로 짚은 것이 충격이 갔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의 아버지의 사고들을 생각해 보면서 위로들을 하신다.
"넘어져서 머리를 안 다쳐서 다행이고,"
"다친 곳이 다리가 아니어서 다행이고,"
"부러진 건 오른손이지만 원래 왼손잡이라 다행이다."란다.
교통사고로 재활을 하실 때, 아버지가 처음 글씨를 썼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마치 "유치원생의 글씨" 같던 그 처음 글씨.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좋은 책이나 글귀들을 직접 종이와 공책에 옮기고 요약해서 쓰는 일을 매일 하고 계신다. 그럴 때 시작한 글씨와 마치는 글씨의 크기가 같고 균등하도록 집중하고 신경을 쓰신다. 더이상 유치원생의 글씨가 아니라 원래 군대에서부터 등사하며 만들던 회보 글씨체를 회복하셨다. 강조할 글씨와 강조하지 않을 글씨의 색깔도 구분하고, 적은 그 노트는, 실제로 예쁘게 출판된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방식의 수작업으로 재 탄생해서 다시 자식과 주변사람들에게 읽으라고 반 강요를 하며 보내주신다. 읽고 버리라시며..
솔직히 말하자면, 읽고 버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처음에는 모으고 놔뒀는데, 공간도 없고, 이제 아버지의 매일의 활동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환하는 일상이 되어 버려서 잘 읽고 나면 버린다. 이미 같은 버전의 수제품들이 몇 벌 더 있다. 복사기에 의존하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직접 같은 글씨를 마치 서예를 쓰듯 쓰고 또 쓰고 그러신다.
그럴 때 가끔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런 구절을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내가 좀 더 잘 했을낀데.."
거기에 나는
"아니거든예. 지금 아시면 그기 되는기거든예."
그러면 웃으신다. 다치고 난 아버지는 참 잘 웃으신다. 예전보다 훨씬 더.
그런데, 비록 왼손잡이시지만 글씨와 식사는 오른손으로 하시기 때문에, 지금 오른손을 못쓰게 되면서 오랫동안 해 온 글쓰기, 요약본 만들기 활동을 못하게 되셨다. 그러나, 웬 걸
"또 유치원생 글씨부터 시작해야 하네.. 왼손으로는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 "
하시며 왼손으로 글씨를 조금씩 써 보기 시작하신다. 곧 나을 부러진 팔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른손이 다 낫더라도 재활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나을 때까지 기다리며 원래 하던 요약본 만들기를 멈추는 게 아니라, 왼손으로 또 글씨를 쓰기 시작하신다. 아버지는 정말 참 작업적인 존재시다..
새벽에 늘 기도와 묵상을 하시는 아버지.
새벽에 가벼운 나무판을 휴지통에 받혀서 책을 읽고 묵상을 하신다. 왜 책상 밥상 앉은뱅이 책상을 두고 나무판이냐면... 버리지 않고 작업을 계속 하셔서 작업공간이 자꾸 비좁아지기 때문이다. 책상에서 앉은뱅이 책상으로, 거기에서 밥상으로, 식탁으로.. 그러다가 원성을 사게 되니까 어디서 나무판을 주워오셔서는 세웠다 내렸다 하신다. 한손만 써도 펼 수 있다시며. 그리고 세우고 나면 공간이 생긴다며..
묵상을 하면서 읽는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구절이 있으신가보다. 다친 오른 손으로 자를 붙잡고 고정을 하고, 형광펜을 왼손으로 잡아 입으로 뚜껑을 뽑은 뒤 자를 따라 줄을 그으신다.
'사악, 사악.' 형광펜 소리는 별로 좋아하는 소리가 아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적막 속의 그 소리가, 어둠 속에서의 그 행동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그렇구나. 원래 아버지는 왼손잡이셨구나.
하지만, 왼손잡이가 아니라 오른손잡이셨어도, 이런 상황이면 왼손으로 글씨를 쓰실 분이구나..
다시금, 나는 사람의 작업에 대한 생각에 도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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