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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0일 금요일

변연계에 흔들리고 변연계를 좌우하는 사람과 사회

우연히 시사인에 막장드라마를 비롯한 TV 프로그램에 대한 인상을 뇌과학의 삼원론에 비유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면서 기사로 나간 원문 뒤에 더 싣고 싶은 내용을, 이 블로그에 올립니다. 


원문은 아래에 링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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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지금 우리나라 대중은 변연계의 문화를 추구하고, 우리나라 문화는 변연계로 대중을 흔든다. 불안, 공포, 우월감, 쾌감만이 주제고 목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화재시 자폐아동을 대피시킬 수 있는 방법을 뉴스에 등장한 소방관이 알려주고, 박진감 넘치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고증된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풍부한 드라마를 보고, 소수자들이 깨알같이 등장해서 다르지만 비슷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고, 그 소수자조차도 풍자의 소재거리가 자연스럽게 될 수는 없을까?

현대 인지과학에서는 '감정은 인지를 위한 관문'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대중문화 매체가 감정을 통해 이성을 깨우며 감성과 지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까?
  

불안이라는 풍랑의 감정의 바다에 떠 있는 무능력한 이성의 배. 
아니면, 감정의 바다가 말라 여행하지 못하는 이성의 배 


하긴, 그러기에는 우리나라 전체가 변연계에 장악되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 큰 이유가 존재한다. 온갖 다양한 활동을 하던 전국이 북한의 포격 한방에 모든 다양함을 멈추고 온나라가 오로지 불안 상태가 된다. 변연계가 과잉작동을 하면 이성은 작용하지 않는다. 누가 밤에 집에 갑자기 도둑이 들어왔는데 배경에 흐르는 음악의 선율이 귀에 들어오며 상황 판단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웅이거나 광인이다. 그래서 범인(凡人)인 우리들은 외부의 적에 불안해 하고, 비슷한 느낌이 오면 외부의 적이 없어도 불안해진다. 솥뚜껑이 자라로 보이는 것이다. 솥뚜껑인지 자라인지 구별할 의도도 생기지 않게 몸과 생각이 꽉 얼어붙는다. 

이솝우화대로라면 늑대라 나타났다고 계속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에게 더 이상 속지 않지만, 변연계가 장악한 뇌는 자꾸 속는다. 자라를 보고 너무나 놀란 인간의 변연계는 솥뚜껑을 직접 봐도 대뇌를 마비시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지 않으면서 자라라고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 우리의 문화와 뉴스가 이미 한번 늑대를 본 세대들에게, 늑대를 본 것과 비슷한 정보를 계속 주면서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 같다는 가설에 대해 이 가설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이면 좋겠다. 물증이 아니라 심증만이라도 좋으니, 우리의 대뇌를 이해시켜주면 좋겠다. 왜냐하면, 공포나 불안의 늑대소문은 꼭 선거 때, 권력자의 부정이 드러날 때, 민심이 힘있는 자들에게 돌아설 때, 꼭 그럴 때 ‘저기 늑대가 있는 것 같아’, ‘나타날 지도 몰라’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불안을 조장하는 변연계는 자기 이익을 위해 지력을 가동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성장한 뇌, 성찰하는 감성과 지성이 조화로운 뇌

뇌는 생물학적으로 성숙하고, 철학적으로 성장한다. 현대 신경과학으로 신경 연결경로가 밝혀지면서 인간의 뇌가 감각에 반응하다가 감정을 느끼고, 감정이 학습과 배움으로 연결되면서 자신을 비춰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깨달아 성찰하는 방향으로 발달함을 알게 되었다. 즉 변연계는 대뇌를 활성화시키고 대뇌는 변연계가 안정되게 하면서 결국에는 대뇌의 총사령관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 감성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 발달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저절로 성찰 능력이 생겨서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인간들의 생활은 인간들의 뇌기능을 반영한다. 즉, [우리의 문화는 우리들의 뇌기능을 보여준다]. 우리가 지성과 감성이 있으면 문화는 지성과 감성을 반영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오락의 정서도 필요하고, 분노를 풀 곳도 필요하지만, 느껴서 이성적으로 펼쳐내는 정보문화와, 결국은 성찰하게 하는 깊은 문학과 예술이 다양하게 공존해야 한다. 이 다양함의 비율이 신경계에서 변연계와 대뇌연결망의 비율만큼 차지할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뇌과학의 문화에 대한 비약일까? 그래서 대한민국의 드라마가 오락이기만 하고 감정해소만 하다면, 우리 드라마에 지식과 문학과 예술이 없다면, 나이는 들었으되 성장은 못하는 뇌들이 대부분이라고 연결지어 생각하면 비약일까? 

변연계만 활동하는 뇌가 장차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변연계만 자극하는 문화가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차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변연계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변연계의 개인, 변연계의 문화, 변연계의 나라. 우우.. 공포스럽다(마무리가 참 변연계스럽다). 

지석연 (작업치료사)



아, 참!.. 시사인에는 본의 아니게 제가 '뇌과학자'라고 나오게 되었는데, 그 이후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과학을 인문학보다 더 선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제게 과학자라는 호칭이 붙게 된다면 우선은 '작업과학자'이며, 신경과학의 경우는 신경과학을 작업과학을 위해 응용하고 추론하는 목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뇌과학자이기보다는 '뇌(신경)과학 응용가'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뇌과학연구를 하시는 분들도, 저희같은 임상가들의 임상적용에 응용되는 것을 바라면서 연구를 하실거라 생각합니다. 큰 의미에서는 '-er'의 직업인이기보다는 '-st'의 현장가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치료사이며, 작업 행동가일수도 있겠습니다. Occupational Activist 정도가 될까요.

댓글 2개:

  1. envy 가장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정서 중 하나인 시기심은 어떻게 분류되어야 할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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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인적으로는 '기쁨, 분노, 두려움(불안), 슬픔, 놀람, 싫어함(혐오)'은 변연계의 본능에 해당하는 정서(emotion)와 비슷하고, 근심, 사랑, 미워함, 질투는 이 본능에 사회적 관계가 포괄되어서 좀 더 복잡한 단계의 감정 느낌(feeling)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이 정서와 느낌은 내가 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니, 나를 성장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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