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체로 90% 안에 속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주변에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건, 개인이 전체의 어는 범주에 속하는지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이 기준은 '부'와 '권력'에 대해 두고 생각해 본 것이다. 아래는, 이런 생각을 할 때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게 한 그래프 두 개를 인용해 보았다.
Wealth Distribution in USA
September 17th, 2009 Posted in Politics
인용기사: [미국 불평등의 현 주소, 심각한 재산불평등]
위의 그림은 미국의 예지만, 우리나라도 불평등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하면 더 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상위 20%의 부와 권력은 전체의 85%에 육박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0%에게 90% 정도로 치우쳐져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삶의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부나 권력과 삶의 지향점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0.01% 정도의 부와 권력자의 지배 구조 안에서 자기 결정권과 자율보다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체계를 이루는 '시킴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혹은, 약하고 소외되고 때로는 대신 억압받는 1%를 보며 그 1%가 2, 4, 8, 16, 32, 64로 배가될 억압과 소외와 빈곤이 확산될 씨앗임을 깨달아, 1%를 알고 돌보면서 작은 수 많은 1%들이 연대하여 90%가 되는 삶을 지향하는 마음을 갖고 실천을 할 것인지. 스스로가 원해서이건 원하지 않고 흐르는대로 살건 간에 크게 이 두 방향으로 나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억압받는 1%가 점점 늘어난다는 느낌이 든다. 장애인, 성소수자, 탈북자, 비정규직 노동자, 노숙자에서부터 부당함을 해결하려 하지만 구조에 의해 배척되어 결국 스스로 살아야 할 힘을 만들어야 하는 언론인들, 적은 인구일지 모르지만 점점 늘어나는 복지 대상 인구를 위해 시스템을 만들려 하지만 계속 좌절되고 힘싸움에서 밀리면서 포기하는 복지인들, 학생들을 더 우선시 하려 노력하지만 시스템에 억압당하는 교원들.. 환자들의 건강과 재활보다 병원 경영이 우선됨을 보면서 노력해도 달걀에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아가는 의료인들.. 비슷한 것은, 개인이 노력하고 결정해서 변화하는 것보다 [체제]를 안정시킨다는 목적이 더 우선시되면서 자기의 안정이 위협받을까 하여 위축되는 개인의 증가가 일부를 약자로, 일부를 편승하는 강자 그룹의 체제 보호자로 보게 된다는 점이다. 후자를 '중간자'라고 부를까..
악다구니를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은 약자다.
약자를 누르고 막으려는 강자의 말은 언제나 약자의 악다구니에 맞춰진다. 그 악다구니는 강자의 폭력 때문인데 말이지.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이르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댔지. 대궐같이 살아도 남을 누르고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 삶 자체가 지옥 아니겠는가. 힘 많고 돈 많은 사람 마음, 삶과 자연과 가치를 모르는 지옥.
문제는, 강자도 아니고 악다구니도 없는 중간자들인데.. 약간의 힘을 가질 때 강자처럼 누리려하고 누르려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참아비규환이 된다. 지금 우리는 물질은 그 어느때보다 픙요하고 기름진 것을 먹고 좋은 경치를 보지만 그 어느때보다 메마르고 건조하고 황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강자처럼 되려 하거나, 강자를 위한 체제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중간자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말이다.
약하고 약하고 약한 한마리 양을 위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되, 거기에서 의외로 위로를 받기에 '아.. 인간은 힘을 가지면 안되는 존재로구나.'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오늘 내게 배움을 주실 존재를 만나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것이 진짜 지향점이 아닌가하는 생각. 나이브하다고 해도,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이 체제와 안전함의 유지에만 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비참해진다. 동물과 다를바가 없거나 동물보다 못한 편나누기를 하는 인위가, 참 비열한 것 아닌가.
_______________
발달장애 아이들이나, 치매 어르신이나.
내 뜻대로 해서 누르려하면 당장이거나 나중에 되돌아오는 문제가 커진다. 설령 나는 좋은 의도를 가졌다 믿어도.
아이나 어르신을 지켜보면서 배우다보면 감동과 내 의도에 반응하고 나도 의도가 아니라 그 반응을 알아 재반응하는 과정을 알아간다. 결국 내 의도는 나만의 의도일 뿐일때와,
정말 내 의도와 그 사람의 반응이 일치할 때의 큰 자기만족이 있을 때.. 무섭다. 내 의도는 정말 문제가 없는지... 아무도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무섭다.
아이나 상대가 내 뜻대로 안될 때 아이와 상대, 환경을 탓하는 어른을 본다. 아이의 호소하는 악다구니, 어르신의 행동.. 이것을 이 사람의 문제며 문제행동으로 본다. 그래서 때리고 묶어서 다스린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한다. 내 탓이 아닌거라 생각하니까.
이런 어른을 약자로 인정해야 할 때가 있고 정말 아닐 때가 있다. 그 구분을 하는 나는 약자인가 강자의 입장인가.. 이를 억압하고 내 뜻대로 개입할 것인가, 아닌가. 집중하고 생각한다. 정말은 강자나 약자의 입장이면 안되니까.
그냥, 나도 자율, 너도 자율, 나도 너를 통해 배우고 너도 나를 통해 배우되 자율적인 관계라야지 위아래로 시키고 시킴 받는 억압의 관계가 되지 않아야 하니까.
________________
이런 생각을 계속 들게 만드는 문제 많은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를 억압하는 사람들.
바늘 위에 선 것 같은 대오각성을 하게 하니 개인의 삶으로써는 감사하다. 그러나, 겪지 않아야 할 겪음이라는 생각이 더 짙다.
우리 사회의 강자들은 문제가 정말 많다.
정말.
그러나... 약자들이 그런 강자를 지향하는 경우도 아주 많다는 것이, 진정으로 슬프다.
내 마음에도 그 느낌이 솟을 때가 있고 그걸 아니까 소름이 더 돋는다.
성선설을 대체로 믿는 편인데, 지금의 환경은 성악설을 부추기는 것 같고, 이를 반박할 근거가 빈약하다.
모처럼 부정적으로 글을 맺는 마음이 몹시 찜찜하다. 오늘은. 이 악순환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