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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9일 목요일

좋음과 나쁨, 과정과 결과, 같음과 다름

어떤 일이 생기고, 어떤 결심을 할 때. 어떤 일이 닥쳐서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는지 생각하고 살필 때, 그 때는 시간과 공간과 행동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 생겼다. 왜 내게 이 일이 생겼는가? 이를 살피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아, 다시. 살필 때는 그 일의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원인을 밝히려 해도 이미 알 수 없는 지나간 일들에 미련을 두어도 바뀌는 것 없이 내 정신과 영혼만 매이고 꼬여갈 뿐이다.
대신 이 일로 인해 나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는 어떤 의미를 생성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유용하다. 더 실리적이다.
나에게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내게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은 꽤 많다.

우리는 대체로 좋은 일, 기쁜 일에 대해서는 왜 이 일이 생겼는지,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고찰하지 않는다. 그런데 괴로움, 다툼, 갈등, 아쉬움은 되새기려 한다. 그런 되새김도 괜찮겠다. 나의 그릇된 부분을 알게 하고, 내 본성의 바닥이나 이기심의 끝과 정신적인 극한 상태와 한계를 알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갈등과 괴로움으로 나를 아는 것은 건강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나를 돌아본다. 나는 갈등을 무척 힘들어한다. 외부 사람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취약하고 감정이 매우 예민하다. 둔감하지 않은 감정이 존재한다. 물론, 어떤 감정은 둔감하다. 만약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취업한 곳에서 작업치료사로 일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부러지고 다칠 때까지 견디지 못하는 감정을 해소하고자 시도했을 텐데, 그럴 때 내가 결국 바꿀 수 없는 부조리와 무식함을 목도하며 살아야만 했다면 대체로 내가 정신적으로 다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길을 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보편적인 길을 갔다면, 나는 지금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양의 시간에 같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내상과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든 그런 경우나 관계에 가두어지면 안된다. 특히 왜곡된 관계는 더욱 그렇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같은 양과 같은 내용이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다른 성향을 띌 수 있다. 그러니, 자기를 알아야 한다. 나에게 해로워도 타인에게 해롭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이로워도 타인에게 이롭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보는 나는, 나라는 인간 본성이 겪고 힘들어하는 스트레스의 느낌과 예민해지는 감정의 시간을 오래 견디기 어렵다. 그러면 개선하거나 벗어나야 한다.

때로는 그렇게 나를 위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타인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본성적으로 자신의 바닥을 경험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는 것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견디기 어려운 그 상황에 타인도 노출되지 않도록 개선하거나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나만을 위한 것을 추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만을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조차 되지 않는다.

예민함은 나쁜 것인가? 아니라 생각한다. 타고난 것이 에민함이면, 예민함을 지키는 것이 선함이며, 타고난 것이 둔감함이면 둔감함을 지키는 것이 선함(나쁨의 반대말이 선함이라고 할 때)이다. 다만, 예민함을 타고났다해고 타고남을 내세워 그 본성을 이기적으로만 사용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변화함'이 없다면, 이는 나쁨이 된다.

좋고 나쁨은 진행되는 것이지 먼저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고 나쁨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자연스러움이 과정이며 결과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완전한 자유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글 제목 붙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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