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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네이쳐냐 너쳐냐, 유전이냐 환경이냐.

논쟁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각자에게 정리가 안되고 끝없이 싸우는 길이 되면 문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각자 다른 관점의 주장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과정, 배경들이 꾸준히 주장되고 정리되어간다면 어느새 융화되어 다른 관점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발전이 없는 주장의 반복은 논쟁이 아니라 그냥 싸움이고, 주장이다.

아주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논쟁을 할 수 없는 주장들이 있다. 그런 주장은 일단은 근거가 없거나 오류가 많아서 무시하도록 하겠다. 일상에서도 간간히 간섭을 통해 이런 주장들을 겪을 때가 있는데, 간혹 무시무시해져서 무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문에, 가장 타당하고 가급적 사실에 가까운 근거들을 찾아서 논리를 쌓아가야 한다.

어느 날인가, 어떤 어머니께서 들고오신 책이 있었다. 하나의 치료방법인데, 그 방법을 마치 만병통치약인것처럼 기록한 것이었다. 정확한 대상과 정확한 증상에 적용하면, 그 증상이 완화되는 치료방법이지만, 대상이 부정확하고 증상이 부정확하면 그 대증방법은 비과학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만, 거기에 혹하게 되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지푸라기 잡고 싶은 마음'일 것이고, '위안'과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아동이나 발달에 관한 책의 제 1장에는 대부분 '유전과 환경'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유전의 영향이냐, 환경의 영향이냐. 중세부터 논쟁이 체계화 되는 듯하다. 인간의 발달에 주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유전이냐, 환경이냐. 사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참 다른 것이 유전과 환경에 대한 관점이다. 같은 쌍동이라도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고, 다른 환경에 살지만 비슷한 증상이나 습관을 가질 가능성도 높다.

다운증후군은 유전에 의한 증상이지만, 미나모토병, 외상성뇌손상, 여러 산업질병 등은 환경에 의한 증상이다. 그렇지만 다운증후군의 발현이 유전자 때문이라 하여 그 부모님들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인구통계학적 연구가 필요하고, 연구는 사람들의 삶에 희망의 근거가 되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운증후군인 아이들이 같은 유전적 상황을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환경에 따라 건강상태가 달라질 수도 있고, 발달할 수 있는 여러 기회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해 다운증후군은 수명도 길어졌다. 그리고 환경에 의한 증상들은 유전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좀 더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

출처: www.tree.com/health/genetic-health-nature-vs-nurture.aspjx

유전과 환경. 선천과 양육. 타고나느냐 만들어지느냐.
이 논쟁은 누가 이기고 지기 위한 논쟁이 아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따지고 들어가서 결국 삶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을 것인지에 대한 행동방책을 세우는 데 필요한 것으로써 의미가 있다.

유전에만 의지해도 안되고, 환경에만 의지해도 안된다. 위 그림을 보았을 때 참 마음에 들었다.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준 것이다. 어떤 그림에는 유전은 씨앗으로, 환경은 토양으로 비유한 것도 있었는데, 이 그림이 조금 더 팽팽해 보이는 논쟁의 상황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타고난 유전을 어찌할 수가 없다. 유전을 무시한 환경접근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요즘 인터넷이나 책에서 발달과정에 대한 지식들이 베포되고 있다. '몇개월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발달행동에 대한 지식은 어떤 아이들에게는 그 개월수에 하지 못하는 것인데, 개인의 유전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하게 만든다. 사실 대표적인 것이 글자교육 아닐까? 3-4살에 글자를 깨우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9살 정도가 되어야 글자의 조합과 의미를 대번에 트여 아는 아이들도 있다. 먼저 시작하는 5-10% 아이들의 유전이, 어른들의 불안과 평균 데이터라는 환경요인들로 인해 결국 하게 될 5-10% 아이들의 유전을 환경적으로 망가뜨리게 된다.

왜 유전과 환경을 이야기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한다.

큰 아이는 유독 체격이 크다. 나도 참 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이렇게 큰 아이는 적어도 나는 처음 본다. 30개월 즈음에 맞는 기저귀가 없어서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고 뒤져 독일제 쥬니어 기저귀를 사서 쓰고, 어린이집에서도 기저귀가 모자라던 날 선생님들이 특대 기저귀를 채운 뒤 여며지지 않아서 유리테이프로 붙여 주시기도 했다. 유모차에 태우고 다녔더니, 바퀴는 퍼져서 모퉁이 돌 때 덜덜거리기도 했다. 아이와 지하철을 타면, 유독 할아버지들은 몇살인데 큰 놈이 유모차를 타느냐고 야단을 하셨다. 둘째와 함께 지하철을 탈 때, 작은 아이는 가벼우니 안고 서있고, 빈자리에 큰 아이(아직 애기였을 때니까)를 앉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요새 엄마들이 자식을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 애들 버릇이 나빠진다며 시비를 걸어서, 결국 왠 대학생이 그 할아버지와 싸우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런 유사한 일들이 생기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아이 나이를 먼저 이야기하게 되는 상황이 생겼다. 대체적으로 체격으로 나이를 짐작하고, 그것으로 사회적 태도까지 강요하는 것은 참 폭력적이라고 느끼게 되었고, 이를 미리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아이들이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정말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비좁을 때는 아이가 힘드니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지나가는 불빛에 매료되어 앉는 자리를 신을 신은채 밟고 올라가서 창에 매달리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때문에 옆 승객들과 야단을 맞거나 싸우기도 하고, 눈총을 받기도 하고, 동정을 받기도 한다. 도움을 받은 날은 다행스럽지만, 아닌 날은 어머니들이 너무 상처를 입으시기도 한다. 물론, 어떤 경우 유머러스하게 대처하시는 분들도 있다. 어떤 아이가 자기만 아는 말로 뭐라고 말을 크게 했는데, 어머니가 "아이 참, 얘는 또 일본어를 하네~."하며 너스레를 떨고 웃으셨다는 이야기를 하신 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래도, 서글프다.

물론, 아이들은 어리고, 게다가 발달이 늦된 아이들은 더 어린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유전적인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외모나 체격에 비해 다른 행동을 한다고 자기가 가진 생각과 기준으로 타인을 대하는 환경적인 어려움은 이 유전적인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유전과 환경 / 선천과 양육에 대해서는 전공시간에 재활의학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히 남는다.
"선천은 7이고, 후천은 3이야. 그런데, 이게 7:3이 아니고, 7 플러스마이너스 3이라는 거야. 7로 태어난 사람이 환경에 의해 10이 될 수도 있고, 4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결국 7:6이야."
내 생각을 정리하자면, 선천에 중요성을 우선 둔다. 환경으로 바꿀 수 없는 기질, 손상, 특징이 있다. 대신, 이 기질이나 손상, 특징 등은 환경에 의해 양화되거나 악화된다는 것은 치료사로써 아이들을 만나는 내 존재감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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