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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일요일

학교를 다니고 교사를 만나는 작업치료사 이야기





어제, #대한감각통합치료학회 #춘계학술대회 에서  #학교작업치료 에 대한 웍샵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작업수행분석과 중재전문가이며, 학생의 수업활동 분석을 하여 학교 참여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올 2월부터School version Assessment of Motor and Process Skills(School AMPS)라고 하는 학교수행분석평가를 강의할 자격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감히 전문가라 말하는 이유는, 이 지식으로 교사를 만나고 부모를 만나면서 서로 상승하는 역할을 하는 협력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함께 협업해온 교사와 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교사는 "내가 교사라서 참 좋다."는 것이었고, 저 역시 "아, 내가 작업치료사라서 참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전문가가 아니라 수행전문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학교라는 곳은(여기서 말하는 학교는 3~18세까지의 유치원~고등학교까지만 한정했습니다) 교육활동만 참여하는 곳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24시간의 삶 중에서, 깨어서 활동하는 오전과 낮동안인 4시간 ~ 8시간 정도의 삶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잠을 '깨고', 밥 먹고, 씻고, 화장실 가고, 옷갈아입고, 단장하고, 가방 메고, 학교로 가지요. 둥근해가 뜨거나 말거나. 교문을 들어서서 교실을 찾아가고, 교실의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갈아신고 교실로 들어가서 내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정리하면 이제 교실활동을 할 준비가 됩니다.

제가 만나는 많은 아이들은, 이 과정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건 학교에서만의 어려움은 아니지요. 너무나 예민해서 태어날 때부터 잠은 20분 정도씩 밖에 자지 않는 아이들도 있어서, 온 가족이 아이가 4시간만 연속으로 잠을 잘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아이가, 이제 자라서 학교를 가면, 얼마나 유리알처럼 자그만 자극에 깜짝 깜짝 예민하게 반응하겠어요. 이런 아이를 사회가 고립시키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이를 알려드리려고 하면, 그냥 '다름'으로 받아들여지기보나는 '편견'으로 보는 부작용이 있기도 해서, 우리 사회의 다름에 대한 편견이 학교로부터 변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기도 해요.

"'학교'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괴로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떠오르지요. 인간의 기억은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더 떠올리는 경향이 있을까요? '학교는 힘든 곳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있는 그대로 이해받기 보다는 계속 강요당하는 것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기도 해요. 하지만, 정말 사소한 감각적 자극에 힘든 이야기도 나와요. "교실이 화장실 옆에 있었는데, 너무 괴로왔어요."라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는데, 그 때 같이 있던 분들이 "맞아, 맞아!"라고 공감하는 반응은 갑자기 화장실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죠. 물론, 이 괴로움은 추억까지 불러 일으켜 불쾌가 아닌 아스라함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학교가 즐거웠다는 분들의 이야기는, "친구랑 놀았던 게 좋았다.", "좋아하는 활동을 해서 좋았다.",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급식이 맛있었다." 등이 있죠. 역시, 공감하는데 이 두 반응을 보면서 '나쁘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보다 '좋고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건강하겠다는 인상을 받아요.

과거의 기억들은 막연하고 조작되기도 해서, 정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겠지요. 늘 그러잖아요. 좋으면 다시 가겠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라고. 좀 더 어린 사람들에게 "지금이 좋~을 때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학교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에게 그 때가 좋을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괴로왔던 기억보다는 행복했을 것 같은 잔잔한 순간의 기억의 조각들에 의지하는 하나의 현실 회피같기도 해요. 심하면 폭력이기도 하죠. 괴로움을 떠올리며 나도 견뎠으니 너희도 견뎌라, 이런 것.

#감각통합 이나 신체활동으로 방과후 수업을 진행해 왔어요. 그러기까지는 교사와 함께 아이를 만난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는데요. 다양한 모습의 아이들을 방과후에 만나는 것이 가치로왔던 이유는, 함께 했던 선생님이 아이의 일상을 공유해 주셨기 때문이어요. 일상의 단편을 방과후 수업 1시간만 딱 떼서 분리적으로 시간 떼우기를 하도록 요구받은 것이 아니고, 저희를 만나는 시간을 통해 다른 시간을 도움 받고자 하셨기 때문에 선생님들과의 나눔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여러 특성의 학교를 직간접적으로 오가고 선생님들의 방문을 받으면서 각자의 지식을 [학생을 중심에 두고] 공유하고 협업하는 과정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선생님들의 수업에 감명을 받을 때, '좋은 교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제가 뭐라구요.. 하지만, 몇 년 같은 학교를 방문하면서 알게 되는 건, 전근으로 교사가 바뀌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좋은 교육체계라도 좋은 교사를 넘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하거든요. 치료사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좋은 치료이론이라도 좋은 치료사를 넘지 못하죠.'

방과후 수업은 아마 제가 처음으로 국가의 지원을 통해 서비스를 진행한 시간이었을거예요. 저희가 만나는 외국 아이들은 자기나라의 치료지원, 교육지원 서비스나 개인이 가입한 교육이나 의료 보험으로 비용지원이 되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개인이나 회사의 지원으로만 저희가 만나왔어요. 이 아이들은 병원에 있는 아이들이 아니거든요. 병원이 아닌 학교와 가정의 적응지원은, 아주 각개전투, 춘추전국시대거든요. 행동수정? 감각치료? 인지? 음악? 운동? 왜~ 따로따로 잘라서 비전문적인 제도와 인력을 더 양산할까요!

국가가 지원하는 서비스의 내용과 비용이 명백히 매우 비효율적이예요. 감히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직간접적으로 펼쳐지는 현실이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어요. 이 부분은 따로 언젠가 깊이 들고 파서 캐내봐야겠죠. 감자줄기 들어올리는 일이 될 거예요. 줄줄이 감자. 이 최종지점이 욕심많은 권력자들로 이어지더라는 담백한 결론만 우선 써 봅니다. 더 가다가는 남북분단, 일제강점까지 갈테니까. 그래서 저의 작업수행 중재는 탑다운을 지향하지만, 현실참여는 버텀업을 지향합니다.

탑다운(Top-down). 아이들을 학교에서 만날 때, 아이들의 감각처리능력을 먼저 관여하지 않아야 해요. 그건, 오류와 비과학적 결과를 낳는 잘못된 중재과정이어요. 어떤 연구결과도 감각통합 중재 자체가 작업수행을 향상한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않았어요. 요리에 비유하자면, 감각통합은 칼을 다루는 기술인데, 요리를 할 때 칼을 먼저 사용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식칼을 잘 다루는 사람이 하는 요리가 맛있다? 앞뒤가 바뀌었잖아요. 좋은 요리를 하는 사람은 칼도 잘 다루겠지만, 영양도 생각하고, 분위기도 살피고, 디자인도 하고, 특히 배고픈 타이밍을 잘 맞추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가장 핵심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요, 학교의 아이들은 학교의 수행으로 먼저 바라보자는 것이어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작업치료의 직업인으로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작업지식을 공유하는 데 중점을 두다보면.. 우리의 학문은 정리되고 발전할 수 밖에 없다고.. 때문에 사람들의 관점이 좀 더 작업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게 공유한다면, 궁극적으로 작업치료사라는 직종이 없어져도 된다는 정신으로 일하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이죠. 너무 투사같나요? 작업치료사는 끊임없이 Minority를 돌아본 사람들이어요. 역사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죠. 재활 분야는 재난과 전쟁, 사고로 발전해왔다고... 이 분야가 너무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래요.

그동안 유치원,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특수학교, 중학교까지 가서 학생들의 수행을 보고, 선생님들을 만나왔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의 한 고등학교를 가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나를 만나주시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분들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울림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할 때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만, 아무도 없을 때 흘리는 이 눈물을, 사람들이 있을 때는 삼키고 참게 되요.. 그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요. 어제 웍샵할 때도 울컥했는데, 삼키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전환할 수 있었어요. 그게 자연스러운 사회적 기술이 맞다고 생각해요.

맺음은, 지금은 나라걱정입니다. 대중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지도자. 그것을 닦을 줄 모르는 지도자. 그걸 줌인하는 카메라. 화면으로 만드는 신문. 그 동안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기를 외면하고, 시혜로만 약자를 바라보는 사람들. 이 분들은 제 작업치료의 대상이거나 소관은 아닙니다. 단지, 사회적 참여로 바꿔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저의 관점이며, 학교를 다니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확신하는 것은,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좋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학교라는 곳은 좋은 치료지원자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이를 협력적으로 실천할 수 있으려면 교사만의 힘으로는 어렵더라구요. 교장 선생님이 허락해 주셔야 하거든요. 힘든 아이가 있어서, 겨우겨우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행정담당 책임자께서 허락을 해 주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또 행정과 정책이 치료지원을 마구마구 해야 한다고 할 때가 있었어요. 이 때는 준비되지 않은 사회초년생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했지요. 학교에서 치료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교육전문가와 치료전문가가 상의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해요. 이런 창구를 정책적으로 제안하거나 시작할 정도의 정책 수준은 어디일까...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겠어요?

만들어진 제도를 따라 산다?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있나요? 이건 제도가 안되서 안한다. 이건 지금 체계가 마련 되지 않아서 못한다.. 그렇게?

제도와 체계는 없지만, 나는 어떤 행동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변화는 오지 않습니다. 자리는 차지하더라도.

변화를 지향하는 조그만 실천. Progress는 그렇게 생기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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