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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2일 일요일

쉼, 휴식이라는 행동

쉼은 본디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쉼은 인위적으로 행해야만 가능한 지금이라 여겨진다.

쉼을 생각해본다. 멈추기, 고요하기, 침묵하기, 듣기,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원하는 것만 하기, 안식, relax, rest, sabbath..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쉼을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이가 여기저기 움직이고 웃고 소리를 내지만 오히려 아이를 끌어안고 토닥여주면 한숨을 내쉬며 고요히 쉬거나 잘 때가 있다. 어리거나 약한 생명의 쉼은, 그가 쉬도록 누군가가 도와야만 편안하게 쉴 수 있다 (극에 도달해 골아떨어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쉼을 생각해본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잠시 떠나 나만을 만나는 시간. 무엇을 하건 상관없다. 장작을 패고 있어도 되고, 삽으로 눈을 치워도 괜찮다. 혼자 책 속으로 빠져들어 그 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도 괜찮다. 무언가를 닦고 쓸고 맞추고 있어도 된다. 타인의 그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나에게 초점을 두는 그 어떤 것.. 그런 장소, 시간, 활동이 쉼이 된다. 

또 어떤 쉼이 있을까. 관계를 통한 쉼도 있다. 마음에 맺힌 관계를 풀고난 뒤 느껴지는 편안함이라는 안심은 안식이 된다. 아무런 평가 없이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안식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쉼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쉼 또한 누군가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쉼의 의미는... 
아마, 다음 생산을 위한 준비일 것이다. 에릭 캔달의 민달팽이 신경연구에서는 앞신경을 계속 자극했더니 뒷신경을 자극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더이상 나오지 않아서 자극에 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게 되지만, 이 때 당분간 쉬고난 다음 신경을 자극하면 이전보다 더 많은 신경전달물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쉼없는 일은 더이상 생산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쉼과 휴식은 생산과 관련된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쉼은 가만히 앉아 있기를 요구받는 아이들에게는 '뛰어놀기', '떠들기', '부산스럽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쉼은 '열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쉼을 위해 생산을 하고, 
어떤 사람은 생산을 위해 쉼을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 쉬고, 
어떤 사람은 성취를 위해 쉬고, 
어떤 사람은 쉼 자체를 위해 쉰다. 

쉼의 길이나 강도는 다 다를 것이다. 

그냥, 지금 내게 쉼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다가오는 말은, 

쉴 수 있어야 하고, 
쉬지 못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게 노력해야 하고, 

일만큼의 가치를 
쉼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쉼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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